종남산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의선사가 세웠다고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였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이 3㎞나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황폐해 폐찰이 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부터 승려 응호·운쟁·덕림·
득정·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 14)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사적비)에 기록되어있다.
이 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漢字)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많은사람들이 찾는다.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종루(鐘樓)가 차례로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송광사 소조사천왕상(보물 제1255호)
사천왕은 원래 인도의 브라만교 또는 힌두교의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수호신으로의
신앙적 기능을 지녀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사찰 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봉안하고 있는데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칼자루의 장식은 없다.
왼쪽 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
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 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장식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불거져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상의를 벗고 바지만 걸쳤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에 굵은 띠가 감겨져 있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 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자세는
북방상과 같으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당(幢)을 잡았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지고 왼팔은 거의 어깨
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들 사천왕상은 눈이 유달리 튀어나오고 수염이 독특하게 뚜렷할 뿐 아니라
다리를 질끈 묶은 표현양식이나 악귀를 발로 누르고 있는 모습 등이 분노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갑옷, 허리띠, 무기를 든 모습 등에서 무장이 갖추어야 할 용맹상들도 아울러 지니고 있어
청정도량을 수호하는 호법신중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사천왕상을 잘 나타낸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와 함께 병자호란을 겪고 난 이후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사천왕상은 역사적으로 국난을 당했을 때 자주 조성하였으며, 그러한 역사적 배경의
상일수록 분노상과 용맹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서방 광목천왕상의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금산화원주조상’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金山畵圓主造像)이란 묵서(墨書)가 있어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건륭오십일년병오오월일···신조성’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의 묵서명이 있어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상호를 잘 표현하고 있는 기법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274호. 높이는 석가여래(중앙) 5.5m, 약사불(좌) 5.2m, 아미타불(우) 5.2m.
석가·약사·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三世佛)로서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의 소조불[塑造佛: 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다.
그리고 이 불상의 복장에서 불경류, 후령통 등 다수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조성시주목록(造成施主目錄)」에 ‘숭정 14년’의 조상기가 있어 이들 불상이
1641년(인조 19)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상기에는 주상(主上)과 왕비 전하의 만수를 기원함과 동시에
“世子邱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亦爲還國(세자저하수천추 속환본국
봉림대군증복수역위환국)”이라 기록하고 있어, 당시 인조의 두 아들로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제작은 당시 승장(僧將)이었던 각성(覺性)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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